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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이 떠난 쿠바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조갑동
강성주 | 2016-12-19 |    조회수 : 1881

조갑동 전 주콜롬비아대사님께서 파델 사망한 날 쓰신 아래 글을 읽어보라고 저에게 보내주셨다.

몇 주 전 칠레 산티아고에 있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숙소 크라운 호텔에서는 투숙객들을 위해
영자신문 주요 기사를 몇 페이지 복사해 로비에 비치해 두었다. 나는 무심결에 한 부를 갖고
로비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몇 개 안되는 주요기사 스크랲에
박근혜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에 관한 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울했던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시는 페루 리마에서 개최된 APEC정상회의 직후 였다. 중국 시진핑이 산티아고를 방문하는 날이어서 교통 통제가 심했다. 
무료함을 달랠 겸 차 안에 있는 현지 신문을 뒤적이는데 일본 아베 총리가 아르헨티나를 방문 중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창문 밖에서 교통 통제하느라 애쓰는 칠레 교통순경들과 이러한 교통통제가 당연하다는 듯
잘 따라주는 산티아고 시민들의 모습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때 꾸준히 쿠바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간 애써온 분이 계셨다는 것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우리 한국의 경쟁력이 어디에 있을까? 은퇴하신 후에도 취미 생활에만 안주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중남미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이고 계시는 조대사님과 같은 분들이 우리의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면서 이  글을 옮겨 싣는다. 




,,,,,,,,,,,,,,,,,,,,,,,,,,,,, 아 래,,,,,,,,,,,,,,,,,,,,,,,,,,,,,,,,,,,,,,,,,,

피델이 떠난 쿠바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지난 11월 25일 피델은 세상을 떠났다.  1959년 1월부터 쿠바를 이끌어왔던 선장은 이제 영원히 잠들었다.  비록 2008년 건강문제로 쿠바국가평의회의장 직을 동생 라물에게 넘겼고 라울은 조심스럽게 완전한 공산 국가경제 체제에서 시장경제 방향으로 변화의 시도를 보였지만 근본적인 골격에 손을 델 용기는 없었다.  혁명을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형 피델의 그늘에서 살아왔던 라울은 이제 처음으로 독자적인 걸음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동생 라울도 85세의 고령으로 2018년에는 나라 일에서 완전히 물러서겠다고 공언하였으므로 쿠바는 많은 변화를 이겨나가야 할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 

수도 아바나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아바나 항구는 신대륙과 유럽을 이어주는 대표적인 거점이었다.  1808년경부터 25년경까지 본국 스페인이 나폴레온 전쟁으로 정신이 없을 때 중남미 여러 나라는 하나 둘 씩 독립을 해 나갔지만 쿠바는 마지막까지 독립을 못하였다.  스페인은 다른 모든 나라는 잃어도 쿠바만은 놓을 수가 없었다.  쿠바는 스페인의 신 대륙 지배의 상징으로 스페인의 영화의 꿈이 스며있는 나라이기에 쿠바 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미국도 쿠바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지점에 있고 카리브의 왕자와 같이 가장 크고 아름다운 쿠바에 욕심이 많았다.  1898년 드디어 미-스페인 전쟁이 일어나고 미국은 쉽게 스페인을 누르고 쿠바, 푸에르또 리코, 필리핀을 장악한다.   

스페인은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보다 쿠바를 잃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역설적으로 스페인은 쿠바를 잃으면서 천 년의 세계제패의 꿈에서 깨어나듯 사상 처음으로 반성의 계기를 맞게 된다. 이렇게 때늦게 스페인에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우나무노, 오르테가 아 가제트 등 세계적인 철학자와 문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명실공히 98년 세대를 이룩한다.      

쿠바는 끈질긴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독립은 미국으로부터 1902년에야 획득한다.  중남미 여러 나라 가운데 제일 늦게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독립은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독립국다운 모습은 지니지 못하였다.  대신에 쿠바는 미국인들에게는 지상낙원처럼 아름다운 고장으로 가장 사랑 받는 휴양지가 되었었다.  독립을 해야겠다는 꿈은 많은 쿠바 젊은이들의 집념이기도 했다.   이러한 꿈의 상징은 시인 호세 마르티 부터 내려온 피델과 그의 동료였다. 

아바나 시내를 산책해 보면 스페인의 마지막 보루였고 미국의 총애를 받던 쿠바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의 옛 모습은 스페인의 어느 도시와 그 도시의 골목들을 산책하는 듯한 감을 받는다.  다만 아쉽게도 윤기 있던 옛 시절의 모습은 1959년에 멈춘듯한 느낌을 준다.  

쿠바 사회주의가 이룩한 업적도 화려하다.  무엇보다 교육분야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의료분야이다.  중남미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쿠바로 의료 관광을 많이 갔다.  비동맹의 수장 같던 쿠바는 세계 어느 곳이던 응급의료지원이 필요 시 쿠바는 수 백의 의료진을 파견하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밖에도 각종 스포츠 활동이 널리 보급되어있다.  특히 야구 권투는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    

그런데 쿠바의 경제는 어떤가?  한 마디로 어렵다.  개인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나라에서 관리 해 왔다.  자유 무역지대를 넓게 설치해 놓고 많은 외국 기업의 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온 외국 기업이 쿠바인들 채용하게 되면 공식적으로는 개인 급료를 쿠바 정부에 지불하고, 정부가 자기들이 정하는 액수의 급료를 지불하는 제도이다.  그럼으로 외국기업들은 직원 급료를 공식적인 통로로 쿠바정부에 지불하면서도 별도로 보너스 형식으로 집어주는 것이 거의 관례처럼 되어왔다.

 이제 이러한 관행도 서서히 정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2008년 동생 라울이 집권하면서 조심스럽게 개인소유를 인정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좀 더 폭 넓은 변화 시도가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쿠바와는 국교를 맺지 못하고 있다. 비록 KOTRA 등 개인기업은 조금씩 진출해 있지만 수교는 안 되어 있다.  혁명 일 세대인 피델과 체 게베라가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서 우의를 다졌다는 사실이 아직도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쿠바 당국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2005년, 본인은 한-쿠바 문화친선협회 이름으로 쿠바혁명의 1세대인 호세 마르티 문화원의 Armando Hart 원장과 만나 MOU를 교환하였고 그 기회에 우리 초등학교에서 사용하던 쿰퓨터 30여대를 교육부의 배려로 쿠바 초등하교에 전달하였으며 또한 한국어 교육을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한바 있다.  한국어 교육은 오늘날까지 아바나 대학과정을 호세 마르티 문화원 강당에서 실시하고 있으며 한국어에 대한 인기는 예상외로 크다. 교사는 한국문화교류재단에서 지원하고 있다.   근래에 한국 TV 방송극이 큰 인기로 보급되면서 쿠바 일반인들의 한국에 대한 동경이 날로 높아 가고 있는 추세이다.   더욱이 쿠바에는 멕시코 다음으로 많은 한인 후예들이 300여명에서 천 여명으로 늘어나 있다.  

   더욱이 오바마 미국 정부와 반세기의 적대 관계에서 국교를 수립하고 이제는 미국과 아바나 직행 항로까지 열렸다. 피델 이후의 쿠바는 시장경제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세기 이상 혁명 정신과 체제로 메어있는 굳건한 군부등 체제가 쉽게 변한다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의 수교는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2016년 12월 4일   피델 카스트로의 장례식 날.
조갑동 전 주 콜롬비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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